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3대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단일화]]에 대한 기대 ====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관심을 모은 후보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그리고 [[야당]]의 이른바 '''3김'''으로 불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었다. 이른바 '''[[노태우|1노]] [[삼김시대|3김]]'''의 [[대선]].[* 실제 언론에서 이들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야권 인사들은 통일민주당을 창당, 결집하고 김영삼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같이 이끌어 온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상당수 통일민주당 지지자들은 단일화를 기대했는데, 마침 두 사람은 경쟁하다시피 양보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김대중은 1986년 11월 5일 '''직선제 개헌이 받아들여진다면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김영삼도 '''그의 사면·복권이 이루어진다면 김대중 후보가 대선에 출마하도록 권유할 것'''[*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6110600329201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6-11-06&officeId=00032&pageNo=1&printNo=12651&publishType=00020|1986.11.6 경향신문]]]이라 발언하여 김대중의 대선 출마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통일민주당 지지자 중 상당수는 두 사람의 대의명분과 약속을 믿었다. 단일화는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실제 김대중은 1987년 7월 10일 기자회견에서도 "나는 대통령이 되는 데 관심 없다. 현재로서 불출마 선언은 변함이 없다"고 발언하였으나, 후술된 지지층의 기대나 알게 모르게 이어진 서로간 갈등, 본인의 대권 욕심 등을 가둬놓을 수가 없었는지 바로 다음 날인 7월 11일 인터뷰에선 '''작년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하면 불출마한다고 한 것이지, 이번처럼 국민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발언하면서 불출마 선언을 하룻밤 만에 뒤집게 된다.[* 후술된 행보를 보면 이 시점엔 대권보다도 차기 당권의 지분을 요구하기 위해 뛰어든 게 더 커보인다.] 이로써 김영삼과 김대중은 야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두고 격돌을 예고하게 되었다. [[파일:external/www.iusm.co.kr/628532_229598_3042.jpg|width=500]]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대중과 김영삼의 사이는 일단 표면적으론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였다. 김영삼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화끈하게 밀어준 적이 있었고, 김대중은 이후 신민당 총재선거에서 김영삼을 전폭적으로 밀어준 적이 있었다. 5공 시절에는 둘이 함께 민주화투쟁의 양대산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김대중이 유신체제, 신군부 시절에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옥고를 치르면서 살아남은 재야의 투사였다면, 김영삼은 야당의 당수로서 제도적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민주 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외국의 사례로 비유하자면 김대중은 [[넬슨 만델라]](남아공 아프리카 민족회의), 김영삼은 [[레흐 바웬사]](폴란드 자유노조)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던 셈이었다.] 약 16년에 걸쳐 김대중과 김영삼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던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